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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추천도서 - 숨결이 바람 될 때

 

 

36세.

공교롭게도 나와 나이가 같다.

한국 나이랑은 좀 다를테니 한 두 살 차이는 있을테지만 그냥 같은 걸로 하자.

그러다 보니 더욱 감정이입이 되었지만, 이상하게도 눈물이 나거나 가슴이 미어짐을 느낀다거나 하지는 않았다.

워낙 문체가 담담해서 나 역시 담담하게 읽어 내려갔다.

 

누구나 그렇듯 나도 일상을 보내는 대부분의 시간 동안 삶과 죽음이 맞닿아 있음을 잊고 산다.

태어난 것은 반드시 죽는다.

도무지 예외가 없다.

두렵거나 먼 미래이거나 아니면 아예 별 생각이 없다거나 하는 이유로

하여간 일상 속에서 죽음을 의식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어쩌면 멀쩡히 잘 살아가는 일상에서 죽음을 의식하고 그에 대한 고민을 하게 된다면 그건 그거대로 이상할 수 있겠다.

 

사실 별 기대같은 건 없었다.

저자 스스로 본인의 삶이 꺼져가는 시간을 기록한 에세이라는 것.

이에 꽤나 많은 사람들이 감동을 받은 베스트셀러 순위권 도서라는 것

뭔가 신파일까 싶은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제목이 참 예쁘다는 생각에 호감(이래서 제목을 잘 지어야 함)

이 정도가 이 책에 대해 내가 갖고 있던 사전 정보였다.

 

따지고 보면 내용이 무척 절절한데도 읽는 동안 눈물이 나거나 가슴이 미어진다거나 하지는 않았다.  

단지 읽는 도중 죽음을 지켜 보았던 기억이 떠올라 마음이 조금 먹먹해졌고,

앞으로 마주하게 될 나와 내 가족의 죽음에 대해 곰곰히 생각해 보게 됐다. 

 

아버지의 임종을 지키던 그 때, 고통스럽게 삶과 이별하는 그의 모습을 보며 도무지 어찌할 바를 몰랐던 내가 떠올랐다.

병원에 내가 도착했을 때, 이미 아버지는 의식이 없었고 각종 생명유지 장치들이 주렁주렁 아버지의 몸에 매달린 채 지속적인 경련에 떨리고 있었다.

그리고 사실 만약 의식이 남아 있었다고 해도 아버지는

'더 이상 의미가 없다면 용감하게 여기서 작별 인사를 하는 게 좋겠다'

랄지 본인의 의사를 표현할 수 있는 상태가 애시당초 아니었고,

나는 그런 아버지에게 마지막까지 가해진 연명치료를 그저 바라 보는 것 말고는 도무지 아는 것이 없는 미성숙한 애송이였다.

지금 생각해 보면 무의식 속에서 마지막 그 시간들이 얼마나 고통스러우셨을까 싶은 생각이 들어 마음이 좀 먹먹했다. 

 

멀쩡히 숨을 쉬며 살아가는 시간 속에 어떠한 의미와 목적이 없다면, 살아간다는 것은 과연 어떤 의미일까.

더 이상 흥미와 목적과 의미를 알 수 없게 된 직장 생활 속 나의 직무는 과연 내게 어떤 의미일까 라는 나의 요즘 화두에까지 옮아가는 질문이기도 했다.

 

 
"이번에 어떻게 잘 버틴다 해도, 앞으로 의미있는 시간을 보낼 수 있을지는 확신할 수 없어"

 

저자 폴은 도덕적 명상과 문학을 통한 간접 체험만으로는 과학과 도덕이 어떻게 교차하는지에 대한 고민을 해결할 수 없었고

그의 화두였던 생물학, 도덕, 문학, 철학이 교차하는 곳은 의학임을 발견한다. 의학을 진지하게 고려해 본 적 없는 그가 의학도로 변모하는 지점이다.  

그리고 그의 그런 고민들은 마지막 삶의 모습을 결정하는 그 순간에 그를 바라보는 모두가 숙연해지는 용감한 선택을 하도록 이끈다.

마지막 순간까지 우아함과 의연함을 잃지 않았던 그의 모습이 경의로웠다. 

 

그리고 이 책의 백미라고 하자면 단연 저자 폴의 아내 루시의 에필로그일 것이다. 

담담하게 써내려 간 폴의 글 이후에 나온 루시의 에필로그는 그보다 한층 더 담담한데,

담담함에 비해 글 속으로 완전히 빨려 들어가는 몰입감이 있다. 

부부의 의연함과 서로를 향한 깊은 사랑.. 그러니 둘이 만나고 살았겠지 하는 생각이 들기도.

 

 

베스트셀러라 할 만 하다.

확실히 책은 종이책으로 읽어야 제맛이다.

이북으로 읽었더니 뭔가 좀 덜 끓인 매운탕을 맛보는 느낌.

역시 서점에 들러 종이책으로 넘겨 가며 다시 봐야겠다 싶다.

그냥 인터넷 서점에 주문을 할까 싶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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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81
무자비한 자연은 인간의 출산에도 인정사정 봐주지 않는다

P119
환자는 의사에게 떠밀려 지옥을 경험하지만 정작 그렇게 조치한 의사는 그 지옥을 거의 알지 못한다

P130
의사의 책무는 무엇이 환자의 삶을 가치있는게 만드는지 파악하고, 가능하다면 그것을 지켜주려 애쓰되 불가능하다면 평화로운 죽음을 허용해 주는 것이다

P160
생물을 규정짓는 특징은 생존을 향한 분투라는 것이다
 
P228
의미있는 시간을 보낼 가망이 없다면, 마스크를 벗고 케이디를 안고 싶어 해요

P233
그는 사람들이 죽음을 이해하고 언젠가 죽을 수 밖에 없는 운명을 정면으로 마주할 수 있도록 돕고 싶어 했다

P238
그가 희망한 것은 가능성 없는 완치가 아니라 목적과 의미로 가득한 날들이었다